우리는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그 세계 사이에 어떻게 접촉면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소설을 쓰며 내가 고심해온 주제였다.
김초엽 작가는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특유의 로맨틱함을 담은 감성SF는 김초엽 작가의 아이덴티티이자 특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작에 이어 [방금 떠나온 세계]는 챕터별로 소수자에 대한 단절과 이해를 주제로 한다.
7개의 단편들은 다음과 같은 차례로 이루어져 있다.
- 최후의 라이오니
- 마리의 춤
- 로라
- 숨그림자
- 오래된 협약
- 인지 공간
- 캐빈 방정식
각 챕터는 소수자를 한 명씩 상정하고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진행된다.
두려움이 없는 종족 중 유일하게 죽음을 직면하기 무서워하는 개체, 시각 인지능력이 없는 모그, 실제 신체와 다른 신체 지도를 지녀 몸을 개조하거나 망가트리는 사람, 지하인들과 다른 생김새와 의사소통 방식을 지닌 원형 인류, 다른 행성에서 짧은 생명을 사는 인류, 신체가 약해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약자, 뇌의 감각통합 능력이 망가져 시간을 다르게 인지하는 물리학자.
이들은 모두 주변과 다름을 인지하고 "잘못된 종에 갇혀있다는 감각"이나 "인류가 공통된 사고체계를 갖는"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주변인들은 그런 특이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더라도 그들의 주변 소수자만 이해한다. 결국 특이자들은 현재의 물리적 시점, 공간을 떠나야 비로소 스스로를 똑바로 인지하고, 타인에게 이해받게 된다.
# 최후의 라이오니
- 멸망한 문명의 수사관이자 회수꾼인 로몬이라는 종족 중 특이하게 죽음들을 구체적으로 직면하지 않음에도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주인공. 그러나 3420ED라는 행성에서의 단독 의뢰로 홀로 회수하러 떠나 개별 개체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기원에 직면하게 된다.
# 마리의 춤
- 시각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모그들의 루트칩을 통한 새로운 소통 방식. 非모그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마리는 특별한 춤을 준비한다.
#로라
- 신체에 대한 다른 인식으로 여러 고민을 거듭하는 로라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체를 변형하는 사람, 인식할 수 없는 신체를 없애려 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로라와 완벽하게 같은 사람은 찾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로라와 함께하려 한다.
#숨그림자
- 원형 인류를 발견하지만, 냄새 입자를 통한 의사소통을 하게끔 발전한 숨그림자 사람들과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원형 인류는 이미 분화된 다른 종이다. 숨그림자 사람들의 원형 인류에 대한 차별의 시선과 과거처럼 지하실이 아닌 지상에서 살 수 있는 행성을 찾기 위한 원형 인류의 노력.
#오래된 협약
- 벨라타 행성 거주민들의 짧은 수명과 벨라타 행상의 종교, 금기. 지구인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벨라타 행성인들은 행성의 금기와 공존하며 살아간다.
#인지 공간
- 인류의 모든 지식이 담긴 공동의 인지 공간에서 지식을 배우기 위해 튼튼한 신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지 공간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왜소한 이브는 인류의 평균치에 따라 이야기가 조정되는 인지 공간의 맹점을 알게 되고, 이브가 죽은 뒤로 제나는 인지 공간을 벗어나 독립적인 기억체를 가지고 떠난다.
# 캐빈 방정식
- 울산 한가운데의 관람차에서는 기이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시간 거품에 대한 연구를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 물리학자 언니의 요청에 따라 관람차에 방문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어코 관람차를 타러 오고, 언니와 함께 탄 관람차에서 현지는 자신의 언니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낀다.
근데, 사실 나는 소설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 배경과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하는 편이다.
단순한 단어와 맥락으로 판타지적인 느낌을 낸다거나, 일상을 촘촘히 분해하여 사소한 일부에 몰입한다거나, 현재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세계를 가정하여 당연한 것들에 대한 합리성과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등 일상을 비일상으로 유도하는 표현력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최우의 라이오니」에서의 "기계 멸망한 거주구", "독립 문명을 유지하던 행성", 「마리의 춤」에서 "생태 순환을 통한 확산", 「로라」에서 "인간의 고유한 신체 지도" 등 부연 설명이 없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맥락에서 "SF 소설"임이 느껴진다.
또한 「마리의 춤」에서 인간의 오감을 분해하여 그중 시각 인지능력에 초점을 맞춘 모그의 존재나, 「로라」에서 인간이 자신의 사지를 자각하는 것을 인간이 고유한 신체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인지 공간」에서는 인간이 개별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당연한 현재와 달리 공통 인지 공간을 지닌 세계를 상정했다. 이런 가정들에서 우리는 현재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일상을 다시금 인지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작가는 포항공과대학 생물학 석사로서 본인의 전공 지식과 상상력을 결코 어렵지 않게 인문학적으로 전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맨틱한 감성 SF라 느끼는 거 아닐까. 어려운 용어들을 남발해도(실제로 남발하지는 않지만) 마션(우주 탐사에 관련된 전문용어를 사용하지만 묘사가 구체적이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처럼 어렵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 책을 덮고 나면 하늘을 보며 조용히 사색하고 싶어 진다.
다 다르게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인지하는 시간의 속도가 다르거나. 신체조건이 다르거나. 신체 지도가 남다르거나) 소수가 공감하고 교류하고 이해하는 삶. 그 와중에 떠나간 관계가 있을 거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속되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관계들의 다양성을 우주적 관점에 빗대어 표현한다. 읽으면서 그만큼 광활하고 다양하고 신비로운 인간관계를 느낄 수 있다. 문장을 되뇌게 되는 일상적인 감성 SF소설, 방금 떠나온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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