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아홉수 가위-범유진ㅣ절망적 현실 속 판타지적 해결

whateverilike 2023. 10.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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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느끼는 현실적 절망과 그에 대한 판타지적 해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있으나, 현실과 또다시 직면하게 되면 착잡한 마음만 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대 소설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나의 고통과 너무 닿아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담은 현대 소설을 보면 현실에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상황 자체가 현실적이고, 나 역시 겪은 바 있고, 현실적인 해결책은 사실상 어렵다는 점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책을 읽는 나에게 현대소설은 그닥 좋은 선택이 아니다.

 

 

범유진 작가의 아홉수 가위는 총 4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책으로, 작고 얇아 1시간이면 읽을 수 있다.

근데 그 후유증은 하루는 감.

1호선에서 빌런을 만났습니다.
아주 작은 날갯짓을 너에게 줄게
아홉수 가위
어둑시니 이끄는 밤

 

스포주의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호선에서 빌런을 만났습니다

사실 빌런은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밈으로 쓰이는 1호선의 빌런들을 현대적 문제와 연결 지은 소설.

 

1호선 빌런은 흔히 특이한 행동들을 하는 승객이 유난히 많은 현상을 말하는데, 주인공은 매번 출퇴근하는 1호선에서 빌런들을 만난다. 그러다 한 할머니가 그에게 씨앗을 5천원 주고 강매한 후 '보안관'이라고 나타난 사람을 피해 튄다.

 

그는 이 씨앗이 자라 알이 4개가 되자 그걸 삼킨다.

안 그러면 화병 날까 봐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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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위 K-장녀의 전형이다.

지원해 주지 않는 부모님, 남동생을 위한 희생, 가정에 돈 부치기를 강요하는 등 희생만 강요하는 부모님과 회사 상사의 성희롱, 성추행까지.

 

 

회사 상사는 회사 이사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사내에서 큰소리를 치는데, 남직원들을 모아 단톡방을 따로 판 후 그 안에 여직원 사진과 불법 촬영물을 함께 올리며 성희롱을 해 신고당한다. 하지만 이게 무려 2번째 범죄로, 이전에 신고한 첫 번째 피해 여직원은 아직 회사에 다니지만 가해자 상사의 면피를 위해 만들어진 부서의 직원으로 발령 난다. 이 첫 번째 피해 여직원은 독하다는 소릴 들으며 퇴사하지 않고 다닌다. 그리고 두 번째 신고자가 발생하자 사내 분위기는 또 뒤집히고, 주인공은 성희롱 및 성폭행 피해 중인이 되어 줄 수 있겠냐는 두 번째 신고자의 문자에 고민하다 회사 상사가 불법 카메라를 설치해 회수하러 올 게 뻔한 회사 화장실에 잠복하다 들킨다.

 

죽겠다!! 싶은 순간 주인공의 입안에서 씨앗이 뱉어지고, 그건 파리지옥처럼 회사 상사를 집어삼킨다.

 

주인공이 삼킨 건 4개의 씨앗.

회사 성폭행 가해자 상사와 주인공의 가족은 주인공 제외 3명.

 

주인공은 계속 남동생 해외여행 돈을 부치라고 독촉하는 엄마의 문자를 보며, 가정에 방문할 것을 결심한다.

 

사실상 주인공에게 있어 빌런은 가족과 주변인들일 것이다.

1호선 빌런이라 생각했던 할머니와 보안관이 실제로 빌런이 아니고 진짜 외계인이었고,

자신의 가족과 같이 친밀한 관계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빌런인 아이러니.

 

그 빌런임이 드러나는 지점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K-장녀들, 그리고 직장인 여성들은 통탄을 금치 못할 것 같다. 1호선 빌런이라는 현실의 유머로 시작했지만, 실제 빌런들에게 피해를 받는 영역이 너무나 명확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저 양자경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행복했으면 한다.

 

 

아주 작은 날갯짓을 너에게 줄게

2차 가해의 절망. 파괴적인 복수를 원한다


소설은 유전적으로 날개를 가진 채 날개를 숨기고 사는 집안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유전적으로 날개를 갖고 있는 이 집안은 이런 날개가 있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기관의 감시를 받고, 만약 전대가 죽으면 후대에게 그 '능력'이 전달된다. 하지만 쌍둥이 자매인 두 주인공의 아빠는 그게 두려워 도망만 다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아빠의 죽음을 느낀 주인공은 날갯짓을 통해 물건을 띄울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된다.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더 큰 날개를 지닌 동생에게 능력이 발휘되었으면 한다. 그 즈음 주인공의 학교에서는 돈을 걸고 간단한 게임을 하는 도박이 유행했는데, 주인공의 쌍둥이 동생이 그 도박의 주도자이자 돈을 빌려준 후 학생들을 노예로 부리는 학생과 사귀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빚을 져 쇼핑몰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주인공은 말리지만 결국 동생은 밀폐된 장소에서 강제로 옷이 벗겨지며 동영상이 찍힌다. 그 동영상에는 날개가 드러나고, 삭제 요청을 해도 복사본이 떠돈다.

 

피해자가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는 사귀었으니 강제성은 없다, 알고 간 거 아니냐, 그러게 소문 안 좋은데 왜 사귀었냐 등 피해자를 비난한다. 결국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피해자인 동생만 집안에 칩거한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주인공은 모의고사 시험날, 작은 날갯짓으로 학교 전체를 들어 올린다. 동생이 원한다면, 떨어트리겠다고 응답하며.

 

소설 속 쌍둥이의 엄마도 사실은 날개가 있었는데, 대대로 남성은 동일한 '보는' 능력이 발현되지만 여성은 어떤 능력이 발휘될지 알 수 없어 너무 위험해 어릴 때 날개를 뜯는다고 한다.

 

 

실제로 주위에서 불법 카메라 범죄는 잦고, 더 이상 학교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외부의 폭력 세력이 불량 학생들을 거점으로 학교 내부로 침입하며, 청소년들이 더 큰 범죄에 노출된다. 실제로 실내 디스코 팡팡 장에서 표를 강매하고, 빚을 지게 해 성매매를 강제하는가 하면, 스터디카페 면접을 빙자해 밀실로 불러 다수가 한 명을 성폭행하고 불법 촬영하는 뉴스들이 빈번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동생을 가해한, 그리고 2차 가해까지 자행한 학교 전체를 들어 올려 모두를 죽이는 것은, 일견 잔인해 보이지만 피해자가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복수일 뿐.

 

 

능력이 있다면 이런 파괴적인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소설 속 동생처럼 이길 방도가 없다.

법과 제도가 미비하고, 피해 청소년이 직접 그 피해를 입증하고 정면으로 나서기란 정신적으로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날갯짓으로 인한 복수는 통쾌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씁쓸하다.

 

 

아홉수 가위

희생과 침묵을 강요하는 억압


주인공은 29세, 자살을 결심하고 고향 할머니 댁으로 돌아온다.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셔 집은 매우 낡았는데, 딱 한 달 치 가량의 식량을 들고 와 식량이 다 동나면 자살하기로 한다. 꿈속에서 자꾸 가위에 눌리고 귀신이 나타나는데, 한 번은 화나서 후려쳤더니 더 이상 우물로 돌아가지 못해 계속 같이 살게 된다. 그 귀신은 알고 보니 할머니의 어린 시절 친구로, 할머니는 예전 주인공에게도, 귀신에게도 참지 말고 살아라 등 여성에게 억압되던 '조신함', 침묵 등에 과감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 귀신은 결국 시집을 가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쫓겨나 물귀신이 되어 지박령이 되었다. 주인공은 할머니 댁에서 살 때는 할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참지 않고 화나면 화나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지만, 가족과 함께 산 후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억압으로 참고 살게 된다.

그러다 지박령까지 자신의 탓을 하자 서러움이 폭발해 '왜 나한테 그래. 왜 나 때문이라 그래'라고 펑펑 운다. 놀라 자신을 달래는 지박령과 마음을 열고, 마음을 다잡아 다시 살아가기로 한다.

 

지옥처럼 괴로운 일이 가득해 아홉수라면, 인생의 대부분이 아홉수다.
그러니 이 스물아홉의 여름도 언젠가 평범하게 지나간 과거의 일부가 되리라.

 

가장 귀여운 에피소드.

 
어둑시니 이끄는 밤

소중한 사람의 죽음과 죄책감


자신이 6살일 적, 18살인 형이 살해당했던 주인공.

주인공은 살인범의 얼굴은 봤으나 야맹증이었기 때문에 식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항상 어둠을 두려워하게 된다.

 

범인은 바로 이웃으로 2개의 불완전수인 8 재물을 바치면 아홉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 범인이 수능을 본 19살에도 형과 다른 18살을 죽임으로써 수능이 대박 났고, 이번 26살 때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자 28살인 현재 또 다른 아홉수인 주인공을 재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려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겨우 벗어나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되고, 예전 자신의 야맹증을 알고 밤에도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인공을 계속 밤에 산책시킨 형의 사랑을 깨달으며 그리워한다.

 
그래. 어둠은 소년을 사랑해.
형은 너를 사랑해.
잊어버리면 안 돼. 절대로.

 

 

원래 26살 때 합격이 목표였던 범인이 실패했던 이유는 성희롱 때문이다.

불법 촬영으로 신고 당한 범인은 '사진 한 장이 뭐라고'하며 억울해 하는데, 이 지점이 작가가 의도한 근본적인 네거티브함이 아닐까 싶다.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성폭력은 전 챕터에 걸쳐 나온다. 주요 갈등 원인일 때도 있고 은근한 억압일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 은연중에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폭력으로 개인의 내면에 네거티브함이 쌓이고, 아홉수라는 표면적인 시기에 폭발하는 것을 그려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네거티브한 에너지의 폭발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

 

범유진 작가의 단편 소설 아홉수 가위는 아홉수라는 부정적인 기운이 주인공을 불행으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떻게 폭발할 수 있는가, 그로 인한 피해자는 누구이고, 그 피해자는 또 어떤 부정성을 내면에 누르며 살아가는가.

 

 

소설의 메시지가 매우 묵직하다.

고통으로 가득한 삶과,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자.

그리고 그에 대해 결국 폭발하는 부정성까지.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 연대하여 용감하게 살아간다.

1호선 빌런에서 상사의 성희롱에 맞서기 위해 용기 내어 증인이 되어주고 증거를 채증하려는 직장 동료들이 그러했고, 아주 작은 날갯짓에서 소수자로서의 삶에 공감한 쌍둥이가 그러했으며, 아홉수가위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큰 목소리를 내어준 할머니, 어둑시니에서 부모의 무관심을 이겨내고 동생에게 사랑을 준 형이 그랬다.

 

아홉수란 각 10년 주기 경계선에 선 인물로, 필연적으로 상실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상실을 경험하고, 그로 인한 고통에 무너지지 말고 주변인의 도움으로 딛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씁쓸한 부정성의 폭발 같지만 그래도 결국 살아갈 용기를 주는 책, 범유진 작가의 「아홉수가위」였다.

 

 

 

아홉수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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