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데뷔작 「고백」이 너무 재밌어서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빌려봤다. 아쉽지만, 「고백」을 전혀 뛰어넘지 못했다.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아름다운 사슬, 찬연한 사랑의 교착
홍보문구가 이런 거라서 사실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다. 뭔가 세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나...인간 관계... 그런 내용들이라 추측이 되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미나토 가나에니까 한 번 읽어봤는데, 내가 왜 일본 소설을 싫어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소설은 세 세대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진행된다. 현재의 리카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녀의 집에 매년 도착했던 K로부터의 꽃, 편찮으신 외할머니가 꼭 사고 싶어 하던 의문의 그림. 물론 세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나중에 합쳐지리라는 건 알았지만 늘 그렇듯이 일본식 이름에 취약한 나는 읽으면서 좀 짜증이 났다. 각 이야기에 못해도 등장인물이 6명 이상 등장하는데, 그렇게 세 가지 이야기이면 한 세대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세대 이야기를 넘어가고...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진행되는 적어도 18명의 이야기로 처음에는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소설이 4/7 정도 넘어갔을 때부터 비로소 1세대와 2세대의 이야기가 나오고 조금 더 뒤에서 3세대 전체의 연결고리가 나온다.
소설은 1세대 미유키를 시작으로 2세대 사쓰키, 3세대 리카의 인생에서 각각 윗세대에서 연관이 있는 인물들과 만나게 된다. 1세대 미유키는 자신의 남편 가즈야와 자신의 오빠인 철없고 능력 없는 요스케 사이에서의 갈등을 그린다. 미유키와 가즈야는 착실히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는 부부였는데, 미유키의 오빠인 요스케가 대기업에 다니던 능력 있는 가즈야를 설계일을 빌미로 자신의 사업에 데려오지만 결국 설계도 시키지 않고 영업으로 부려먹는다. 심지어 가즈야가 몰래 준비하던 동네 미술관 설계공모전에 출품한 설계도면도 사무소의 이름으로 몰래 정정해 제출하여 빼앗는다. 여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죽음을 매도한다! 가즈야가 죽고 난 후 불임부부로 아이를 포기하고 있었던 미유키에게 사쓰키가 생겨 미유키는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된다. 여기서 이미 다음 세대에서 뭔 짓을 해도 용서하지 못할 짓인데 심지어 2세대는 더하다.
미유키의 딸인 2세대 사쓰키가 같은 등산 동호회 회원이었던 기미코, 고이치 선배, 구라타 선배와 친하게 지냈는데 구라타 선배가 급성백혈병에 걸리고 이때 동호회 회원들끼리 골수를 기증받으려 하지만, 같은 혈액형인 기미코만 수혈을 해주고 고이치 선배와 사쓰키가 같은 골수임을 알게 된다. 같은 골수는 찾지 못한 구라타 선배는 결국 죽는다. 구라타 선배가 죽은 이후 고이치 선배와 사쓰키는 서로 위로하는 존재로 사귀게 되지만 고이치 선배가 사쓰키와 육촌 관계이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요스케의 조카(아들이었나?)임을 알게 된다. 사쓰키는 아버지의 원수와 관련된 사람과 사귀고 싶지 않아 헤어지게 되고 그 뒤로 야생화 작가, 그림 교실 선생님으로 살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K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사실 이 미지의 K라는 존재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전반적인 미스터리한 키워드인데 별거 없다. 그냥 기미코다. 기미코가 본인의 이름을 미유키에게 들키지 않고 사쓰키를 불러낼 때 쓰던 이니셜이다. 기미코는 그렇게 몰래 사쓰키를 불러내어 고이치 선배가 백혈병에 걸렸고, 같은 골수인 사쓰키에게 골수 기증을 부탁한다. 이때 "고이치 선배를 도움으로써 구라타 선배를 돕는 거야." 라는 망발을 씨불인다. 아니, 그게 왜? 구라타 선배는 이미 죽었고,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인 고이치를 도움으로써 어떻게 고이치를 돕는 거고, 애초에 왜 사쓰키가 구라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물론 이때 기미코는 고이치 선배와 결혼을 한 사이였다. 기미코가 학창 시절 구라타 선배에게 수혈을 해준 전적이 있으니 이제 사쓰키에게 고이치 선배를 도와라 이건대, 수혈과 골수 기증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도 웃기고, 구라타 선배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던 사쓰키에게 과거의 감정과 죄책감을 빌미로 골수 기증을 요구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그러나 마음 착한 사쓰키는 결국 고이치에게 골수 기증을 해주고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고이치는 계속 이니셜 K로 사쓰키에게 매년 꽃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세대, 리카는 계속 도착하는 꽃과, 할머니가 구매를 부탁했던 그림에 대한 의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근데 K의 비서는 항상 태도가 안 좋았는데, 알고 보니 K의 비서란 사람은 고이치와 기미코 사이의 아들이었고, 자신의 아버지 고이치가 매년 꽃을 보냈던 사람을 불륜 상대라 생각해 리카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또한 그 모든 사슬을 알기 위해 리카가 비서가 부른 별장?같은 곳에 도착해 들은 이야기로 리카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사실 요스케에 의해 유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늦은 밤, 외할아버지인 가즈야가 설계도면에 영감을 받았던 곳을 가보자며 생떼를 부린 요스케를 차마 혼자 보내지 못해 따라간 가즈야는 발을 헛디딘 요스케를 구하다 죽게 된 것이고, 이때 요스케는 가즈야가 무리하게 빗속에서 해당 장소에 갔다가 미끄러져 죽은 것이라 거짓 증언한다. 그리고 그를 따라갔던 제3자(이름 까먹음) 역시 거짓 증언에 동참한다. 가즈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설계도면을 완성했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올려주지 않았다는 주제넘은 심정이 그 이유였다. 이에 리카는 외할머니인 미유키가 구매를 원했던 그림인 "미명의 달"을 대신 인수해 미술관에 전시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근데 여기서 고이치의 아들인 비서가 그림 밑에 "가즈야를 기리며,"라는 문구를 멋대로 집어넣는다. 이에 리카가 이유를 물어보자 "당신이 외할머니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할아버지를 좋아하니 그만 할아버지를 해방시켜 드리고 싶다."라고 한다.
여기서 기함을 토했다. 뭐...뭐라고???
일본 소설에서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피해의식을 드러내는데 이 대목이 바로 그 절정이었다.
애초에 가즈야의 설계를 뺏은 것도, 가즈야를 죽인 것도 요스케다. 피해자가 3대에 걸친 가해자들을 용서해 주는 조건을 왜 가해자 the 3rd인 본인이 마음대로 외할아버지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는데 이용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혼자 아버지의 불륜으로 오해하고 리카에게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도 안 했으면서.
가해자는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강요하며 그러지 않으면 본인들의 잘못은 스스로 용서하고 죄책감을 완화한다. 가즈야의 장례식에서 요스케가 가즈야를 매도하는데, 이때 미유키가 요스케에게 가즈야의 공모전 참가 소식을 흘린 건 나쓰미라 생각해 나쓰미에게 한소리 한 구간이 있는데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제3자가 본인이 이야기했다는 걸 알고 나자 적반하장으로 화낸다. 본인이 그 사건으로 말을 흘린 것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다며. 동서와 도련님이 죽은 건 아무렇지도 않고 본인이 그 사건에 조금이나마 연루되었던 건 기분이 나빴나 보지? 그리고 기미코 역시 사쓰케에게 남편에게 기증해준 골수에 대한 고마움만 있지 자신의 가정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비서도 마찬가지.
대체 죄책감은 누가 갖고 있는 건가?
피해를 받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죄책감도 없다. 심지어 요스케조차 미유키에게 찾아가 설계도면을 뺏은 것에 대해 자신의 사무소에 미술관 설계도면 입상 경력을 빼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건 본인이 그 설계를 넘지 못하다는 언론의 비난과 열등의식 때문이지 진정으로 가즈야와 미유키에게 미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설계도면을 훔쳐 사무소는 승승장구해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으면서 그 어떠한 죄책감도, 사죄도, 그렇다고 보상도 하지 않는 사람들. 정말 그 뻔뻔한 가해자들에 숨이 막힌다. 그런데 그걸 가해자의 후손인 비서가 피해자 몰래 등을 쳐 해방해 주는 꼴이라니.
소설 「고백」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와중에도 확실히 복수에 성공했기 때문에 매력이 있었다.
아무리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어도 절대악은 분명했으며 피해자가 가해자를 확실히 비난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용서하건 말건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첩되는 것도 스트레스 없이 설득력이 있었지만, 꽃사슬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상황에서 복수는커녕 불완전한 용서만 한다. 고백의 성공 요인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뭐가 아름다운 사슬인지 모르겠다.
세대들 사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확한데 뭐가 아름다운 건지...? 심지어 연결되는 사슬에서도 무시할 수 있을만한 사소하고 의미 없는 연결고리들이다. 2세대에서 육촌의 이야기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니까. 또 사스케의 남편인 마에다가 우연히 사쓰케와 같이 예전에 등산 동호회를 했었고 그 사람의 산장에 사쓰키가 그렸던 야생화들이 있었던 것. 뭐 화과자 이름 어쩌고. 그렇게 뜨문뜨문 연결고리들이 있기는 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사랑의 교착?
사랑도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뭐 1세대에서 미유키에게 가즈야를 소개해 준 게 공교롭게도 가해자인 요스케의 아빠였던 거? 근데 그건 미유키를 위해서였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요스케 아버지 회사에서도 가즈야는 착실한 직원이었다. 또 2세대에서 사쓰키와 고이치가 사귀기는 했지만 백혈병으로 죽은 구라타 선배 옆에서 의리를 다지게 된 수준이지 큰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또 같은 등산 동호회 친구인 기미코와 고이치 선배와 구라타 선배를 두고 누구를 선택할지 경쟁하는 거? 그래서 기미코가 사쓰키에게 누군들 양보해준 거? 그게 뭐 교착인가 그냥 대학생들이 연애 대상을 자기들끼리 다툰 거지 진지한 교착이라 할 수도 없다. 애초에 기미코도 사쓰키에게 선택의 여지를 줄 권리도 없고. 차라리 고이치와 사쓰키가 얼마나 죽고 못 사는 사이였는지 구구절절하게 나왔더라면 세대에 걸친 사슬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교훈은 뭘까. 1세대에서의 갈등과 범죄를 3세대가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해 주는 것? 내용의 신박함도, 놀랄 만한 반전도, 사슬의 설득력도, 그렇다고 명확한 교훈도 없는 평범한 일본 소설, 꽃사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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