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없이 봐야 한다고 장르가 무엇인지도, 주제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지 않아 궁금해서 냅다 사서 봤던 책. 근데 막 스포 없이 봐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케팅의 농간인가..? 싶기는 했음.
근데 키워드들이 많기는 하다 #진화 #소수자성 #사회적약자 #국가권력 #기득권층 #미국의과거제도 #제꼬리를먹는우로보로스 #정부정책의실패 #약자의인권 #잊혀진피해자 #살아야하는이유 #엔트로피법칙 #인생의목적 #사명감 #그릇된신념 #갈등 등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래 내용은 사실 해석이라기보다는 읽으면서 내가 느낀점이자, 나의 사유의 과정이다.
책은 '나'의 인생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들 위주로 전개가 되는데 그중 초반에는 '아버지'와 책 전반에 걸쳐 나오는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생애를 다룬다.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biography를 따라가며 그에 대한 '나'의 깨달음과 사유를 바탕으로 글이 이어진다.
우주는 혼돈 뿐
VS
여러 생물과 그 분류는 신의 계획
책 서두에는 아빠, 이 책은 아빠를 위한 책이에요.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나'의 아버지는 책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하고, 그 안에서 개인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고 어린 '나'에게 끊임없이 말하던 사람이다. 이에 '나'는 인생에 의미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자 삶의 의미, 목적 달성에의 집념까지 보이는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생애를 연구하게 된다.
왜 "물고기"는 없을까?
맨 처음에는 제목에 따라 왜 '물고기'인지를 따라가면서 읽었다. 특히, 책의 원제가 Why fish don't exist. 즉 "물고기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정언명령스러운 한국 제목과 달랐기에 더 궁금했다.
그러다 종의 분류가 나오고 아가사와 데이비드가 멍게를 하등한 존재로 구분하고, 인간을 상위존재로 명명했을 때, 장애인, 정신이상자들에게 '부적합' 판정을 내려 그들을 불임화했던 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인권 관련해서 '물고기'라는 하등한 생물은 존재하지 않고 모두 소중하다!!라는 생명의 소중함을 담은 키워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물고기 즉, 어류라는 종 자체가 없다는 거였다! 애초에 범주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 제목은 굉장히 사실기반의 그 어떠한 비유도 담지 않았었다. 말 그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류를 어류로 인식할까. 한 꺼풀밖에 되지 않는 비늘과 그 비늘이 형성된 '물'이라는 환경 때문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자란 환경으로 말미암아 편협한 인간으로 자라난다. 어린 시절 자신이 존경하던 형이 전쟁에서 죽어 전쟁을 어쩌고 하는 비폭력주의자가 된 것, 그리고 종의 분류에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바치게 된 시점이었던 아가사의 캠프라는 환경이 데이비드 스타 존슨을 그와 같은 인간으로 자라게 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인류의 발전사로 볼 수 있다.
신성한 사다리, 자연의 사다리처럼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종의 기원을 통한 기준의 상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물의 우열을 가린다는 목적성은 인정하지 못하는 데이비드 존슨. 그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나'와 소설 밖의 '우리'는 그 우생학에서 벗어나 평등을 주장하고 있지 않나!
"모든 자 ruler뒤에는 지배자 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 물고기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자연에 부여한 질서? 혼돈의 세계에서 붙잡고 있으려는 질서? 그 질서의 허망함? 인간의 양면성? 인간의 아집? 뭐 사실 대체적으로 정도만 다를 뿐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우리가 임의로 자연에 그려 넣은 '선'. 그 선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차별을 하며 고통을 받아왔는가. 엔트로피는 증가 하는데 그 안에서 질서를 붙잡고 있으려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혼란과 질서_자연의 사다리
#자연의사다리 란, 모든 생물을 하등한 생물부터 신성한 생물까지 차례대로 배열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성한 사다리의 개념이 발전된 것으로 자연을 박테리아에서 시작해 인간에까지 이르는, 객관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신성한 계층구조로 구분지은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존슨은 이 자연의 사다리를 종교적 텍스트로 해석했던 자신의 스승 아가사에서 나아가 인류 발전에 대한 우생학적 관점을 끌어들인다.
여러 인종차별, 우생학, 사회생물학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점에서 다윈은 굉장히 억울할 만한데, 다윈은 오히려 인간 종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학자였기 때문이다. 스펜서가 찰스 다윈의 생물학을 사회생물학으로 들여오며 인종차별과 학살들이 자행되었고, 데이비드 스타 존슨 역시 그 이념에 동의해 적극적으로 인류 발전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강제로 불임화하는 법제정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 차별은 유구해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비하.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생애 역시 말 그대로 질서와 혼란 사이를 오갔다.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발견해 내 가치를 부여하던 그가 "보잘것없는 것"들을 파괴하고 살해하는 사람이 된 것.
어린 시절 자연물을 구분하고 이름을 알고자 했던 자신의 취미를 부모가 쓸데없는 짓이라며 폄하했을 때의 시련, 존경했던 형이 전쟁으로 죽었을 때의 혼돈, 그러다 아가사의 캠프에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의 사명감을 찾았을 때의 질서, 물고기 탐험에서 사랑하는 동료들이 죽었을 때의 혼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 때의 평이한 인생, 물고기 표본이 세 번이나 훼손되었던 혼란, 스탠퍼드 대학의 총장이 되어 자신의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느꼈을 삶의 질서, 우생학을 근간으로 국가 주도의 불임수술을 강행한 혼란, 제인 스탠퍼드의 살해.
자신의 신념에 매몰되어 그를 지키기 위해 여러 비이성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한 그의 끝없는 자기기만, 긍정적 착각은 아집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새삼 알려준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병들고 인류가 퇴보하는데 말이다.
삶의 태도_민들레 법칙
자, 그럼 다시 "내"가 왜 데이비드에게 집착했는지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녀는 평생에 걸쳐 자신을 짓눌러 온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했는데, 그게 가시적으로 표출된 기점은 남자친구와의 이별이었다. 본인의 잘못으로 여성과 캠프에서 하룻밤 실수를 하고 그를 사실대로 말하자 "나"의 전 남자친구를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계속해서 남자친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재결합하기를 원하지만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할 때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일화를 듣게 된다. 물고기 표본이 망가진 세 번의 사고에도 기어코 몸에 이름표를 꿰는 것. 바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질서의 구축을 위해 객체의 그 "실체"를 망가트리는데 서슴없는 집념은 무엇이었나.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민들레 법칙이란 누군가에게는 잡초인 민들레가 누군가에게는 약초, 미술의 염료, 화관,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처럼 그 존재 가치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개인의 생에서도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고 혼돈만 가득한 삶이, 누군가에게는 가치가 넘치는 풍요로운 삶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소설의 '아빠'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없지만, 나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것도 내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것 아닐까. 무너진 희망 속에서 그다음의 한 발자국을 나아가는 것. 여러 주류의 기준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의 속도에 맞추는 것.
왜냐? 어차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런 기준을 버리고 나면 우리는 별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을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천동설을 해체하고 나자 우주를 연구하게 된 것처럼.
만약 "나"가 데이비드의 생애에 감화되었다면 그녀 역시 남자친구에 대한 집착이 심화되어 살인까지 가지 않았을까? 마치 데이비드 스타 존슨이 물고기의 살을 꿰뚫어 이름표를 단 것처럼. 데이비드가 욕심에 못 이겨 제인을 살해한 것처럼.
다양한 인간군상_명명의 무의미함
소설을 읽다 보면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체감할 수 있다.
평화상을 받았지만 우생학에 심취해 죄 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중성화시킨 이중적인 데이비드 스타 존슨을 위인이라 할 것인가 살인자가 할 것인가. 부적합자라는 주홍글씨로 중성화 수술을 당하고 난 후에도 모성애를 갖고 린치버그 수용소의 많은 아이들을 돌봐준 애나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어머니? 유모? 그럼 모성애는 또 무엇인가. 아이가 없음에도,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임에도, 아이를 사랑하는 '호르몬'이 나올 수 있는 장기가 없어졌음에도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단어로 규정할 것인가. 기관에서 나온 애나와 그녀가 돌보았던 메리가 평생을 자매처럼, 혹은 연인처럼, 혹은 모녀처럼 지내는 것은 뭐라고 명명할 것인가. 양성을 사랑하지만 결국 전남자친구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겨우 떨쳐내고 현재 사랑하는 여자와 살아가는 "나"에게 단순히 "양성애자"라고만 명명할 것인가.
음~ 솔직히 쓰면서도 뭔 말하는지 모르겠다ㅎ
읽다 보면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데, 사실 서술이 굉장히 명확하기 때문에 순행, 역순행에도 그저 순리처럼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다. 자서전을 읽는다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어느새 내가 책 속에 감화되어 이름 없는 조연이 되어 있는 것만 같다. 나 역시 "나"를 따라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생애를 훑어보고 그의 삶에 생각해 보고, 린치버그 수용소에 들어가 그 참혹한 광경을 상상하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심오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축약적이라 계속 되뇌게 된다.
혹자는 이 책을 읽고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오른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소설의 내용은 그 정반대이다. 명명의 무가치함. 존재의 허상. "가치"나 "관념"이란 무엇인가... 그 모든 "기준"들을 무너트리고 우리가 얻을 건 무엇인가. 자유로움 아닐까?
이런 사유의 끝에 내가 도달한 곳은 「팔꿈치를 주세요」에서 김초엽 작가의 "양면의 조개껍데기"였다. 바다로 가는 것. 끝없이 광활한 자유로움 속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
이런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들이 많기 때문에 이 책을 아무런 스포 없이 보라는 거 아닐까 싶었다. 확실히 각 키워드마다, 각 단원과 서서히 밝혀지는 데이비드 스타 존슨의 생애마다 생각한 거리들이 많다. 천천히 읽으며 자신의 신념과 살아온 과정,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 깊이 사유할 기회가 되는 책,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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